1. 앤디워홀에 대한 궁금증의 시작
팝아트의 대가 앤디워홀의 일대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지만 그림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 중에 앤디워홀은 꽤나 친숙한 이름이라 나름 조사하여 알아두면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다. 예술과 창조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그를 단지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묶어 두고 바라보기엔 적절치 않다. 왜냐하면 그는 21세기가 가장 원하는 인재형이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원하는 인재인 앤디워홀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알아가 보도록 하자.
2. 앤디워홀의 일대기
1928 8월 6일,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맥키스포트에서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란스카파티 안 지방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며, 할 수 있는 일이 막노동뿐이던 아버지는 탄광 지대의 광산에서 광부로 일하다. 1931~1933 (3~5세) 서너 살 때부터 손에 연필이나 색연필을 들고 벽과 방바닥을 가리지 않고 자꾸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다. 어머니는 스케치북을 사주며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대여섯 살부터 주변의 물건들을 제법 비슷하게 그리기 시작하다. 1934 (6세) 홈스 초등학교에 입학하다. 미술 시간에 종이를 오려 붙이는 것을 비롯해 콜라주를 좋아하다. 1935~1938 (7~10세) 그림 그리기 외에도 영화배우들과 만화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필름 프로젝터까지 사주어 단편 영화와 만화들을 보게 하다. 아홉 살 때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사주어 사진을 찍게 했으며, 집 지하실에 만든 임시암실에서 직접 필름을 현상할 수 있게 하다. 여덟 살에서 열 살까지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첫날에 류머티즘 무도병이라는 병으로 쓰러지다. 이렇게 3년째 여름방학마다 아파서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평소에도 몸이 약해 학교에 자주 결석을 하다.
1939~1741 (11~13세) 홈스 초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토요일 오전마다 '카네기 뮤지엄'에서 열리는 무료 예술교육 과정 참여를 권유해 이를 받아들이다. 1942 (14세) 홈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켈리 고등학교를 진학하다. 카네기 공과대학(지금의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도 미술을 가르치던 조지플 피츠페트릭의 미술 지도를 받다. 아버지가 결핵성 복막염으로 돌아가시고 앤디워홀의 큰형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1944 (16세) 앤디워홀의 어머니가 암수술을 받으시게 되었고 건강을 되찾았다. 1945 (17세) 스켈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피츠버그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광고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기 위해 카네기 공과대학에 입학하다. 1945~1948 (17~20세) 필립 펄스타인은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데 이 시기 때 만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조지프 혼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재학 중에는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카우프만 복지관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1949~1951 (21~23세)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예술학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펄 스타인과 함께 뉴욕으로 가게 되어 프리랜서를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첫 직업은 [글래머]지의 <성공은 뉴욕에서 이루어진다>는 에세이에 들어갈 삽화를 작업했으며 그 후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게 되었다. 뉴욕의 상업미술 책임자들은 이후 앤디워홀을 주시하게 되었다. 이때 '워홀'은 '워홀라'에서 성을 바꾸게 되었다. 잡지 일러스트 외에도 컬럼비아 레코드 앨범 표지, 크리스마스 카드, 책 표지, 소규모캠페인 광고, 쇼윈도 디스플레이 문구 등 상업적인 디자인 작업들을 주로 맡아하게 되었다. 1951 (23세) 훗날 앤디워홀의 영화에 출연하는 루퍼스 콜린스, 탤리 브라운 등이 극장 리빙 시어터를 개관하다. 이곳에서 조너스 매커스의 영화 [브리그]를 보고 자극을 받은 후에 단일 사운드트랙 시스템을 갖추고, 더 긴 장면들을 촬영할 수 있는 고기능 카메라를 구입해 사용하기 시작하다. 1952 (24세) 마약과 범죄 예방이라는 주제로 CBS라디오 프로그램 측의 포스터 의뢰를 받게 되다. 이 작업을 하고 나서 아트디렉터 클럽에서 주는 상을 수상하다. 1954 (26세) 개인전을 두 번째로 로프트 화랑에서 하게 되다. 1955 (27세) [잃어버린 구드를 찾아서] 랠프 포머로 이의 글과 구두 일러스트를 앤디워홀이 그려서 출판하다. 워홀이 디자인한 아이 밀러사의 구두광고가 [뉴욕타임스]에 실리게 되었고, 500만 명이 보는 잡지 [라이프]에 워홀의 드로잉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실리면서 더욱 유명해지다.
1956 (28세) [어린이 책을 위한 앤디워홀의 드로잉] 2월 14일 ~ 3월 3일 보들리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지다. [미국 최근 드로잉] 4월 뉴욕 현대미술관(모마)에 앤디워홀의 작품이 전시되다. 찰스 리산비라는 친구와 함께 6월 16일~8월 12일 동안 세계여행을 하다. 아이밀러사의 구두 광고 디자인으로 상업미술가 클럽에서 주는 상을 받다. 상업미술가로 이름을 날리면서 순수미술에 대한 열망을 더욱 품게 되고, 세계 여행을 하는 동안 그 꿈이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12월, 보들리 화랑에서 다시 개인전을 가지다. 1957 (29세) 상업미술계의 권위 있는 상으로 알려진 아트 디렉터 클럽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하다. 1960 (32세) 순수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시기가 이때이다. 상업적 드로잉을 그만두게 되다. 재스퍼 존스와 라우센버그는 추상표현주의에 도전하며 이름을 얻고 있었고 이들에게 자극을 받으며 순수미술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더욱 확고하게 세우다. 코카콜라병을 주제로 한 그림 두 점을 처음 그리게 되었다. 이때부커 광고와 만화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때이다. 카스텔리 화랑에서 일하던 이반 캅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고 카스텔리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었으나, 리히텐슈타인과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그림을 전시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다. 1961 (33세) 캠벨 수프 통조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1961년 말경, 예술품 중개상인 앨런 스턴이 화실을 찾아와 수프통조림 그림을 보고 한눈에 반하다. 로스앤젤레스의 중개상인 어빙 블럼이 워홀의 그림을 보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페러스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자고 제안하다. 1962 (34세) [타임]지 5월 11일 케이크 한 조각 스쿨.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워홀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실리다. 할리우드 스타를 주제로 실크스크린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다. [129명 사망]을 그리다. 6월 재난시리즈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로스앤젤레스 페러스화랑] 7월 9일 ~ 8월 4일 캠벨 수프 통조림 32점을 전시하다. 블럼이 32점을 모두 1000달러에 사기로 하고 그 후 이 돈을 10개월에 나누어 주다. [뉴욕의 제니스 화랑] 8월, , 새로운 리얼리스트.라는 팝아트 전시회에 초대되어 2달러짜리 지폐 그림을 출품하다. 제니스 화랑에서의 전시 후 미술계의 유명 인사가 되다. <메릴린 먼로 두 폭> Marilyn diptych는 Marilyn Monroe를 묘사한 미국 팝 아티스트 Andy Warhol의 실크스크린 그림 1963 (35세) 작업실을 만들게 되었다. 렉싱턴 근처 이스트 87번가에 있는 2층 벽돌 건물을 세내게 되었다. 재난 시리즈 <자살. 을 그리다. <시각적 차 사고>, <오렌지색 5명의 죽음>, <라벤더빛재난(전기의자)>, <붉은빛의 인종 폭동>, <푸른빛 전기의자>, <13명의 지명 수배자> 등으로 이어진 재난 시리즈는 1965년의 <원자폭탄>까지 계속되다. 첫 번째 영화 <잠>을 만들다. 절친하게 지내던 시인 존 조르노가 알몸으로 지는 모습을 그대로 찍은 6시간짜리 영화로, 이 영화는 다음 해인 1964년 1월 17일 ~20일에 그래머시 아트 극장에서 상영되어 평론가들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워홀이 초기에 만든 영화는 <잠>에 이어 여러 사람들의 키스 장면을 모은 <키스>, 한 남자가 머리를 자르는 과정을 담은 30분짜리 <머리 깎기>, 팝 미술가인 로버트 인디애나가 버섯을 먹는 모습을 찍은 <먹기>등이 있다.
1964 (36세) 맨해튼 남쪽 이스트 47번가의 건물로 작업실을 옮기고, 이 작업실을 '팩토리'(공장)라고 이름 짓다. 이곳에서 캠벨 수프 깡통만큼이나 알려진 브릴로 박스 조형물, 재키 초상화와 꽃 그림들, 광고와 언론 매체 세계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의 연작을 만들다. 4월 21일~5월 9일, 일레노 와드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회가 열려 400개나 되는 브릴로 상자가 전시되다. 11월, 카스텔리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리다. <꽃> 시리즈를 전시하다. 작품이 전부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다. 영화 장르 중에서 가장 걸작인 <엠파이어>가 제작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한눈에 보이는 록펠러 센터의 한 창문에서 찍었으며 상영시간이 8시간 조금 넘다. 영화 네 편을 뉴욕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하다. <마릴린> Shot Marilyns 실크스크린 페인팅 제작 1965 (37세) [엠파이어] 3월 시청극장에서 상영되어 좋은 평을 받다. 첫 번째 미국 회고전은 10월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캠퍼스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리다. 몰려온 사람들이 록 콘서트장에서처럼 열광하는 바람에 에디 시즈윅과 함께 천장을 뚫고 탈출하다.
1966~1967 (38~39세) 카스텔리 화랑에서 황소 벽지 그림과 <은빛 구름>을 전시하다. 흑백과 컬러를 섞어 편집한 영화 <첼시의 소녀들>이 제작되다.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 이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다. 1968 (40세) 개인전 - 스톡홀름의 현대미술관 '팩토리'를 미국 공산당 본부가 입주해 있던 유니언 스퀘어의 건물로 옮기다. 이때부터 팩토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작업실보다는 사무실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다. 6월 3일, 솔라니스라는 여성에게 총격을 당하다. 심한 부상을 입고 7월 28일까지 병원에 입원하다. 1969 (41세) <인터뷰> 8월 존 월콧의 제안으로 잡지를 발간하다. 이번 발간한 잡지를 통해 새롭고 창조적인 사람들과 소통하며 활기를 얻다. 1969~1972 (41~44세) 초상화 주문제작을 하다. 예술가 친구들과 화랑 주인들의 주문 초상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 제작되는데, 연예계 스타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유명 인사들, 부유한 사람들 등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1972 (44세) [리처드 닉슨 대통령] 강렬한 초록 얼굴의 포스터를 제작하다. 포스터 판매 수익을 민주당에 기부한 결과로 국세청의 보복성 감사를 받다. 1970년대에도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나, 갑자기 회화로 돌아와 <마오> 초상화 시리즈를 제작하다. 어머니가 사망하셨고 장례식 참석을 하지 않았다.
1975 (47세) [앤디 워홀의 철학 : 팝아트의 거장이 쓴 자전적 에세이]를 출간하다. 1976 (48세) [앤디 워홀의 배드] 조합 사람들과 함께 뉴욕에서 35밀리미터 필름으로 촬영하다. 출연진은 앤디 워홀과 친한 스타들로 구성되었고,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다. <망치와 낫>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하다. 1977 (49세) <망치와 낫> 카스텔리 화랑에 전시하다. 이 그림이 팔린 상태에서 나중에 파리의 다니엘 템플은 화랑에 다시 전시하다. 1980 (52세) 다양한 비디오 작품을 만들었으며, <파피즘:워홀의 60년대>를 출간하다. 1981 (53세) 맨해튼 도심의 옛 전자제품 공장을 200만 달러에 인수해 작업실을 그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이 되다. 카스텔리가 기획한 <달러 사인> 전시회를 열었으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다. <앤디 워홀 텔레비전>이라는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해 출연, 이 텔레비전쇼도 자신이 제작한 영화처럼 시나리오 없이 즉흥적으로 진행하다. 1984 (56세) '뭉크'와 '르네상스 그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의 제작을 시작하다. 1985 ~1987 (57~59세) 드라마 <사랑의 유람선>에 카메오로 출연하다. <앤디 워홀의 15분>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하다. 1987 (59세) 2월 21일에 뉴욕 프레즈비테리언 병원에서 담낭에 염증이 생겨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다음날 2월 22일 상태 악화로 안타깝게 사망하다.
3. 총평
최고의 예술가이며 사업에서도 성공가도를 달려가던 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상업미술가와 순수미술가로 모두 성공해 이름을 떨쳤으며,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한 예술가였다. 예술과 비즈니스를 적극적으로 결합했던 그는 수많은 작품과 일화를 남긴 채 이렇게 그의 영원한 창조적인 예술의 세계로 떠나게 되었다. 17세 젊은 나이에 시작한 미술의 세계에서 차곡차곡 계단을 밟아 나가는 매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일대기는 예술로 가득 찬 하루하루였음을 이번기회로 알게 되었고 매우 예민한 기질에도 인간관계가 상당히 좋았고 이 모든 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공감과 배려를 배운 덕이라고 알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오리고 찢고 붙이는 창조적 행동을 맛보며 행복감을 주었다. 필름프로젝터와 카메라를 어린 나이부터 마음껏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등 이런 활동이 앤디워홀에게 평생 동안 예술에너지의 원천이 되었고 이것은 현대사회에 자녀를 키우는 부모라면 공감이 간다. 훌륭한 예술가는 훌륭한 어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법칙은 역시나 진리인 듯하다. 이번 계기로 앤디워홀의 작품을 하나하나 검색하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림의 순서도 나열해 보고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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